[940자의 편린들] - 다울 (국민일보 수필 3.7~4.4)

ⓒ Fragmente (1931)-Wassily Kandinsky
<누가 인터넷 중독에 돌을 던지랴>
내 만성 통증 질환과 그 삶을 다룬 책 <천장의 무늬>에서 유독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온라인상에서의 만남, 요즘 말로 하면 비대면 대면의 중요성이다. 매일 누워 지내는 동안 내 삶의 공간과 관계가 재편되었고 당연하게도 매우 외로워졌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외로우니 더 서러웠다. 세상과의 분리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에 매우 자주 접속했다.
요즘은 아는 사람을 넘어 연예인이나 정치인, 유명 예술가 그리고 그외 모르는 사람의 사생활처럼 보이는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나는 가끔 아무런 접점도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의 SNS를 통해 그 사람의 반려견과 연애 대상, 직업 혹은 작업 등을 관찰한다. 그 행위는 종종 관음증적으로 느껴지며 그것이 나의 길티플레져인지 길티인지 플레져인지 다소 헷갈린다.
컴퓨터 앞에 앉아 대량의 게시물을 감상하며 자문한다. ‘나 혹시, 인터넷 중독?’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공간에 얼마나 머물러야 중독이라 부를 수 있을까? 기술의 발전으로 인터넷 평균 체류 시간은 분명 늘고 있고 코로나 19로 더욱 늘었다. 티브이는 비교적 기능이 단순해서 바보상자라는 혐의를 얻었지만, 컴퓨터처럼 기능이 다양한, 놀이와 노동, 학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계는 쉽게 단죄가 어려워 보인다.
말 없는 소통을 넘어 목소리를 주고받는 소통이 하고 싶었다. 코로나 19로 온라인 모임이 대풍년을 이루고 있다. 아쉬운 점이 많지만 적어도 외출이 쉽지 않은 내겐 반가운 현상이다. 온라인으로 많은 것을 누린다. 미술 전공자들이 이끄는 만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영화 속 좀비 연대기에 대해 강의를 들었으며 동지들과 공포 소설을 읽고 가상 캐스팅을 벌였다. 컴퓨터가 익숙지 않던 내 어머니도 이제는 무리 없이 티베트 승려의 실시간 온라인 무료 강의를 듣는다. 아픈 몸을 가졌기에 역설적으로, 역병 이후를 만끽하고 있다. 오늘도 타인의 하의를 궁금해하며 컴퓨터 앞에 앉는다. 2022-03-07
* 첫 번째 연재 글입니다. 공개적으로 연출 된 장면을 지켜보는 것을 관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최근 읽기 시작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책 <에 우니부스 플루람 : 텔레비전과 미국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적 관음의 본질은 엿보기, 즉 평범하지만 성적 기운으로 충만한 소소한 일상사를 영위하는 사람들을 그들 모르게 관찰하는 것이다. 창문이나 망원경을 비롯하여 틀에 끼운 유리를 수단으로 삼는 고전적 관음이 얼마나 많은가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틀에 끼운 유리는 텔레비전 비유가 그토록 솔깃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텔레비전 시청은 순수한 관음 Peeping-Tomism과 다르다. 텔레비전의 틀에 끼운 유리 화면을 통해 여러분이 보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실은 아주아주 '많은' 누군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화면에서 온갖 평범하지 않은 동작을 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훔쳐보는 이 어마어마한 군중 때문임을 안다. 텔레비전이 진짜 엿보기의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은 연출이요 구경거리여서 정의상 관찰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관음자가 아니다. 시청자일 뿐이다.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청중이지만 대개는 혼자 시청한다." (<에 우니부스 플루람 : 텔레비전과 미국 소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노승영 엮고 옮김, 알마 출판사).
<함께 사는 고양이의 라디오 사용에 대해>
엄마도 나도 함께 사는 고양이 무디에게 종종 자신을 투영해 친절을 베푼다.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뉴스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엄마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였다. 고양이 무디가 심심해할까 봐 틀어놓으셨다고 한다. 집을 비웠는데 사람 목소리라도 들리면 덜 무료할 것 같다고. 정말 친절하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고양이 무디는 귀가 매우 밝다. 자주 미간에 힘을 준 채 눈을 꽉 감고 자며 귀를 팔락인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가늘게 눈을 뜨고 쳐다본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는지 몸을 떨다 깬다. 나는 무디가 귀를 팔락거릴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내가 소음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상품평에 혹해서 충동적으로 샘플 귀마개(이어 플러그)를 종류별로 다 샀다. 나의 귀는 어쩔 수 없이 옆 좌석의 험담에 가담하고 옆 가정의 폭력에 연루된다. 무디가 그러는 것처럼 작은 소리에 깨어나고 몸을 떨며 깬다. 무디와 나는 거의 동시에 현관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너무 많은 소리는 수면을 방해하고, 고양이는 수면 시간이 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이 무디가 집에 혼자 있는 동안 라디오를 틀어놓는 것에 내가 반대하는 이유다. 동물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때다.
방에서 늦잠을 자고 있으면 엄마와 무디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물론 무디의 답변 또한 엄마가 한다. 엄마는 동식물과 함께라면 1인 2역, 때에 따라 1인 3역, 4역 등을 할 수 있다. 무디는 그 대화 소리를 퍽 좋아하는 것 같다. 그 앞에서 자주 몸을 뒤집고 뒹굴기 때문이다. 나도 세상의 모든 소리 중 그 소리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내게 소음에 속하지 않는다. 무디에게 라디오 뉴스는 소음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아예 큰 소리로 음악을 듣는다. 고양이 무디의 라디오 사용에 대한 의견은 보류다. 2022-03-14
*무디는 잠을 잘 때 이마에 잔뜩 힘을 주어 여러 갈래의 주름이 생깁니다. 저는 이를 꽉 물고 자는 탓에 치아의 신경이 손상되었는데요, 무디에게는 손상이 없었으면 합니다.
<봄봄봄봄 봄이 왔어요>
이사한 곳은 버스로 이십여 분 거리에 대학교가 있는데 청년보다는 노인이 많이 보인다. 청년들은 아마 대부분 기숙사에 살거나, 아니면 나와 이동 경로가 겹치지 않는 모양이다. 유교가 유행했던 나라에서 자라서인지 노인을 보면 모르는 사람이어도 자꾸 인사를 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꾸벅하고 말하면 대부분 대꾸는 없다.
얼마 전 호떡을 사러 집 앞 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부쩍 따뜻해진 날씨에 옷을 가볍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 구경하고 있었다.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곳이었다. 가까이 가니 부부처럼 보이는 두 중년의 상인이 자신의 상점 앞에서 꽃과 모종을 잔뜩 팔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주방 가전을 비롯한 각종 가전과 가구를 취급한다. 유리문 앞에는 먼지로 뒤덮인 중고 냉장고가 쌓여 있다. 한 손님과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꽃 판매는 봄이 오면 잠깐 벌이는 게릴라 사업인 듯했다. 그날 꽃과 모종 앞에는 대여섯 명의 중년과 노년 남녀가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난 봄만 되면 그렇게 가슴이 설레어.” 그러자 주인 중 한 명이 말했다. “언니가 사는 게 행복해서 그래.”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몇 마디의 대화를 더 했다.
꽃을 아주 좋아해 본 기억은 없지만 봄이 오면 산란하던 마음이 살랑인다. 여름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나는 빽빽한 초록의 풀들이 단체로 고성을 지르는 것 같은 여름을 좋아한다. 따뜻한 날씨에는 각종 병증이 줄어들어 외출이 즐거워진다. 겨울 동안 상실한 자기애와 인류애를 회복하기도 한다. 겨울을 예고하는 가을에는 마음이 살랑이기보단 울렁인다. 이제 곧 길가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평상과 의자에 걸터앉는 노인이 늘어날 것이다. 그들은 주로 지팡이나 손수건을 쥐고 입을 벌린 채 허공을 응시할 텐데, 나는 벅찬 가슴 때문에 그들을 유난스레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꾸벅 인사한 다음 대부분 대꾸는 받지 못할 것이다. 2022-03-21
* 저의 글쓰기 동지이자 가시두더지의 멤버 조개 님은 이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습니다. "노인분들과 같은 자리에 있지만, 소통하기 어려운 그 마음이 엄청 가볍고 따듯한 글 속에 있어. 봄바람 같아 글이. 귀엽고 슬퍼. '문희의 봄'이 생각 나" 다음은 조개 님이 소개한 <거침없이 하이킥>의 한 에피소드 '문희의 봄'의 링크입니다 (https://youtu.be/zTczlQQ4A0k). 이 영상을 보고 위 글의 제목을 지었습니다.
<웃음의 종류>
웃음의 종류에 대해 생각한다. 먼저, 미소는 ‘짓는’ 것이다. 작을 ‘미’ 자에 웃을 ‘소’ 자를 써서 소리 없이 빙긋 웃는다는 것이 사전적 정의다. 우리는 거짓으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그러니까 미소는 비교적 주체할 수 있는, 통제가 가능한 웃음이다. 차가운 웃음이라는 뜻의 냉소는 주로 ‘하는’ 것이다. 냉소적인 표정을 거짓으로 짓는 경우는 드물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옛날에 어떤 냉소적 인물에게 잘 보이고 싶어 거짓으로 냉소적인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 뿌리 깊게 자리 잡힌 냉소는, 쉽게 거둘 수 있는 미소와 달리 꽤 긴 마음 수련 끝에 거둘 수 있다.
실소는 분명히 ‘짓지’ 않고 ‘한다’. 실소하다라는 표현 대신 실소를 터뜨린다는 표현을 함께 쓰기도 한다. 실소는 터뜨린다는 표현과 함께 쓰이듯 통제가 잘되지 않는 웃음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은 막을 도리가 별달리 없다. 그렇다면 폭소는? 터뜨린다. 폭이라는 한자는 터지고 폭발하고 불사른다는 뜻을 가졌다. 그야말로 빵 터지는 것이다. 갑작스레 터지는 폭소는 예측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 의도치 않은 눈물과 침으로 얼굴이 뒤덮일 수 있는 것이다. 위험한 종류의 웃음이다. 심지어 속옷에 실례할 수도 있다.
얼마 전에는 영화를 한 편 봤다. 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무대 위에서 자신의 아내를 간지럼 태워 죽이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구르며 자기 아내의 비명과 신음, 폭소를 흉내 냈다. 나는 간지럼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심한 간지럼은 내게 극한의 포복절도를 선사해 이성을 놓은 채 험한 욕을 하고 상대를 팔꿈치로 가격할 명분을 준다. 간지럼은 폭소의 예측불가능한 영역을 예측가능한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그것은 웃음의 세계에서 오히려 실례이자 반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지럼으로 사람을 웃겨 죽인 코미디언 당신, 옐로카드. 2022-03-28
* 이 글 속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정체는 영화 <아네트>에서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캐릭터 헨리 멕헨리입니다. 헨리 맥헨리는 무대에서 총에 맞는 장면 또한 연출하는데요, 어떤 관객들은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해 비명을 지르고 어떤 관객들은 연출된 장면으로 알고 박장대소합니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는지 제 친구들이 저를 보고 비명을 지르다 웃기를 반복하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 <헬터스켈터>의 가장 첫 번째 대사를 떠올렸습니다. "제일 첫 한마디. 웃음과 비명은 매우 비슷하다" (<헬터스켈터>,오카자키 쿄코, 이소담 옮김, 쪽프레스). 조르주 바타이유의 다음과 같은 구절도 떠올렸습니다. "현기증은 두려움으로 우리를 마비시키는 대신 떨어지고 싶은 충동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떤 위험한 요소가 발생했을 때, 고통과 비례해서 커지는 미친 웃음과 비교해 봐야 한다" (<에로티즘의 역사>,조르주 바타이유, 조한경 옮김, 민음사). 영화 <아네트>에서 코미디의 원칙을 위반한 헨리 멕헨리는 점점 퇴물(?)이 되어갑니다.
<엄마의 텔레비전 사용법>
엄마는 개표방송을 앞두고 부랴부랴 중고 텔레비전을 사왔다. 휴대폰이나 노트북으로도 방송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던 것이다. 다만 후에 그 사실을 알고도 엄마는 꼭 텔레비전으로 개표방송을 보고 싶어했다. 구매한 텔레비전은 25인치로 요즘 나오는 거대 텔레비전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그러나 크기 역시 중요치 않았다. 엄마께 텔레비전이란 공식적이고 상징적인 무언가처럼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도구였다. 시청률이라는 표본은 국민의 입맛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방송사의 일방향적 송신은 우리를 무거운 텔레비전 앞에 앉게 만드는 강제성을 부여했다. 대선이나 월드컵, 올림픽 같은 나라의 대소사를 두고 우리 가정이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다른 가정 또한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음을 뜻했다. 그러한 감각은 남들과 같은 국민으로 존재한다는 소속감을 가져다줬다.
그런데 아뿔싸 아무도 텔레비전 설치 방법을 몰랐다. 엄마는 결국 본인의 휴대폰으로 방송을 봤다. 며칠 뒤 설치 기사를 통해 연결에 성공했다. 관리비에 포함돼 있는 텔레비전 수신료 덕에 수십 개의 채널이 쏟아졌다. 텔레비전을 안 본 지 오래고 게다가 우리 가정은 한 번도 ‘케이블 방송’을 설치한 적이 없어 그 진풍경이 조금 낯설었다. 나는 어렸을 때 오직 다섯 가지 채널만을 이동하며 눈이 새빨개질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신문에서 편성표를 뒤지던 일이 전생 같다. 그렇다고 전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이제는 집에서 리모컨을 독점하던 ‘리모콘의 제왕’이 사라졌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기기로 보면 그만이니. 다만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지고 강제성이 없어지니 아아 정신이 산만해져 온다. 엄마는 새로 설치한 텔레비전을 켜면 리모컨으로 11번부터 누르고 그 이하로만 채널을 움직인다. 관성 탓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 선택과 집중이 놀랍다. 2022-04-04
* 채널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기에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다양한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이로 자란 것은 아닐까 억울해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각종 스트리밍 사이트로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 선택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토록 꿈꾸던 케이블 방송 또한 그 가짓 수가 너무 많아 리모콘을 쥐고 한 없이 채널을 옮기기만 합니다. 한 익명의 독자분께서는 "집중의 시대가 가고 산만의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는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읽었지만, 다울 님의 글이 벤야민보다 와닿습니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