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어린이 선언 - 박조개

ⓒ 『어린이』 11권 12호
1923년 <어린이해방선언문>은 어린 동무들에게 말한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¹
이 문장을 읽고 몸을 일으켰다. 우리 집 늙은 개가 오늘 산책을 안 했다. 돋는 해도, 지는 해도 보지 못했다. 어린이가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야 한다면, 늙은 개도 마땅히 그럴 것이다.
‘어떡해. 보리(늙은 개)에게 지는 해라도 보여줘야겠네.’
중얼거리며 개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늙은 개가 천천히 걸었다. 기뻐하는 것이 보였다. 꼬리도 들려져 있고 귀도 서 있었다. 발을 비틀비틀 놀리면서 걸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게 하는 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토요일이면 어린이를 만나러 간다. 세 명의 어린이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만나서 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쓴 글을 서로 읽어준다. 나는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글감을 골라서 간다.
도서 신간 목록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방정환과 어린이 해방선언 이야기》²를 발견했다. 그 책은 1923년 조선 소년운동협회가 발표한 <어린이 해방선언문>을 한 문장 한 문장 소개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해방되려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린이도, 여성도, 조선인도, 프롤레타리아도 함께 해방을 외쳤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거나,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게 아니면 보통은 관심이 없다. <어린이 해방선언문>을 받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그날따라 나는 ‘이 글은 좋다!’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린이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어린이의 뜻을 물으며 수업의 포문을 열었다. 눈치 빠른 이율이가 스크립트에 적힌 것을 읽고 대답했다.
“아동을 높여 부르는 말이요.”
“맞아. 어린 + 이라는 뜻이에요. 어리다는 건 실제 너희들처럼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고, ‘이’는 ‘님’처럼 높임말이에요. 늙은이, 젊은이랑 동등한 거예요.”
어린이들은 듣는 듯 마는 듯했다. 지예는 종이에 아름다운 고양이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 아름다워! 하고 감탄을 했다) 성우는 지루한지 의자를 뒤로 빼며 까딱까딱하고 있었다. 이율이는 뭘 말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율이는 초등학교 5학년으로, 지예와 성우보다 한 살 많다.
“그래서 오늘은 뭐 쓰는 거예요?”
어린이들이 일제히 물었다. 이들은 읽기보다 쓰기에 관심이 많다.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2022년 어린이 해방선언을 써볼 거라고, 그러기 위해 1923년 어린이해방선언을 참고할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³
“재래의 윤리적 압박이란 뭘까요? 나이가 들수록 더 높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에요. <어린이 해방선언문>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율이가 말했다. “언젠가 어떤 할아버지가 우리보고 버릇없다고 혼낸 적 있어요.”
“그래!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늙은이와 어린이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없어요.”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이 글을 읽어주면 되는 거예요?”
“맞아요!”
이율이가 글쓰기 공책에 그만의 어린이 선언을 적었다.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훈수를 두지 않는다.⁴
아직 다른 문장들을 읽기도 전인데 이율이는 하나를 읽고 열을 생각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선생님에게 존댓말을 쓰는 거는 선생님도 우리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기 때문인가요?”
“맞아요.”
식은땀이 흘렀다. 사실 지금껏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오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반말을 썼다. 이제 와서 <어린이 해방선언문>을 읽으려고 하니, 반말을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새롭게 시도했다.
김소영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에서도 이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나를 별명으로 부르게 하고 서로 반말로 대화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금방 마음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만큼 열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⁵
나는 ‘재래의 윤리적 압박’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쉬운 것은, 내가 어린이에게 젊은이, 늙은이 대하듯 존댓말을 쓰는 것이다. 그날 처음 시도했고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차차 변해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방정환은 <심부름하는 사람과 어린 사람에게도 존댓말을 합시다>에서 말했다. “새로운 윤리를 세우는 한 가지로 어린이 운동을 하는 우리는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쓰자고 결심했다.” 존댓말과 반말, 그 중 한 가지를 택해 대화하는 것이 새로운 윤리라고 그는 그 시절에 말했다. 지금도 유효할까? 이율이의 질문에 “맞아요.”라고 대답해버렸으므로 적어도 글방에서는 유효하기로 했다.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⁶
두 번째 문장을 읽고 이율이는 무슨 뜻인지 금방 짐작했다. “그때는 어린이들에게 노동을 시켰으니까 이런 말이 있는 거죠?”
나는 재빨리 이 문장에 대한 이주영⁷의 해석을 덧붙였다.
“여기서 노동이라는 건 어쩌면 돈을 버는 노동만 얘기하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미래의 일꾼이 되기 위해 지나치게 공부를 하는 것도 노동이라고 할 수 있대요.”
이율이는 눈빛을 빛내더니 공책에 무언가를 적었다.
학원은 가고 싶은 곳만 간다.
숙제를 없앤다.
학교에 가기 싫다면은 가지 않아도 된다.⁸
성우는 이율이 공책을 보고 신이 나서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한참 돌아다니더니, 이렇게 적었다.
학교에 안 가고 싶으면 안 간다. 만약 가고 싶으면 안 간다. 하지만 체육을 하는 날에는 간다. 학교에서 체육을 무~~~~지~~~~한다.⁹
이율이와 성우가 활발하게 토론을 하고, 토론에 따른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느라 바쁠 때, 지예는 조용했다.
“저는 요구하고 싶은 게 없는데요....”
지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린이 해방선언문>중에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받아쓰고, 소감을 적어보라고 했다. 지예는 혼자 공책과 씨름을 했다. 지예가 받아 적은 건 <어린 동무들에게> 중 한 문장이었다.
꽃이나 풀은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¹⁰
지예는 그 밑에 이렇게 적었다.
나도 동의한다. 왜냐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¹¹
지예가 다른 동지들과는 달리 자신부터 돌아보았다는 점에서 나는 몰래 감동을 했다. 지예의 글에는 집에 사는 고양이가 자주 등장했다. 그 고양이의 취향, 행동, 생김새가 세세히 묘사되곤 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수업의 피날레는 이율이의 마지막 문장이 장식했다.
<글방 규칙> 글을 다 쓰면 무조건 게임을 한다.¹²
어린이들이 쓴 훌륭한 문장들 중 적어도 이 문구는 당장 실행할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이율이의 <글방 규칙>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서로 나누어 읽고, 마지막으로 게임을 하고 헤어진다.
2022 어린이 선언문
김이율
- 학원은 가고 싶은 곳만 간다.
- 숙제를 없앤다.
-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 학교에 가기 싫다면은 가지 않아도 된다.
- 훈수를 두지 않는다.
- 모두 다 공짜로 한다 (어린이만)
- 해외 여행을 적어도 1년에 한 번 간다.
-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다면 키우게 해준다.
- 정부에서 돈을 지급해준다.
<글방규칙>
- 글을 다 쓰면 무조건 게임을 한다.
- 게임을 하기 싫어도 한다.
<학교>
- 하루에 적어도 2교시씩 체육을 한다.
¹ 방정환, 김기전, <어린이해방선언> 중 <어린 동무들에게>, 1923
² 이주영, 《방정환과 어린이해방선언이야기》, 모시는사람들, 2021
³ 방정환, 김기전, <어린이해방선언> 중 <소년운동의 기초조건>, 1923
⁴ 김이율(12세), <선언문>, 2022
⁵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사계절, 189p
⁶ 방정환, 김기전, <어린이해방선언> 중 <소년운동의 기초조건>, 1923
⁷ 《방정환과 어린이해방선언이야기》의 저자. 한 문장 한 문장의 해석이 책에 담겨있다.
⁸ 김이율, <선언문>, 2022
⁹ 박성우, <선언>, 2022
¹⁰ 방정환, 김기전, <어린이해방선언> 중 <어린 동무들에게>, 1923
¹¹ 전지예, <어린이>, 2022
¹² 김이율, <선언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