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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의 조개] ➁ 쿠웨이트를 탈출하는 방법 - 박조개



ミロコ マチコ (Machiko Miroko)



중 2가 되니, 흥, 학교에 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엄마한테 학교에 안 다니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요즘의 공교육에 찬성하지는 않는다고 누누이 말해 오던 사람이었다. 뜻밖에도 엄마는 내 말에 반대했다. 내 편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도 몰랐고, 원하는 대로 하려면 더 강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엄마는 나를 살살 달랬다. “성적은 상관없으니까 졸업장이라도 받자.” 담임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한국에 와서 상황을 알고 나를 윽박질렀다. “학교 그만두고 뭐 할 건데?” 그럴 듯한 말로 타이르기도 했다.

“네가 미치게 푹 빠진 뭐가 있어야 그만 두는 게 학교야.”


‘으악! 이 많은 어른을 설득해야 한단 말이야? 무슨 수로? 그나저나 학교 그만두고 할 것도 없잖아.’


동물들이 우리를 탈출하는 이유는 뭘까. 바깥 세계의 자유가 탐나서? 너른 들판에서 마음껏 달리고 싶어서? 아니, 그런 동물은 없다고 한다. 그들이 우리를 탈출하는 이유는, 우리에 대한 불만 때문, 우리가 살 수 없는 공간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나도 이제 그만 탈출해버리고 싶었다.


이런 상태에서 1년 넘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할 수 없음’의 낭만에 빠졌다. 갈수록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성적은 상관없다’는 말의 실사판이 되어, 껍질만 학교에 가고 본체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만화를 읽었다. 나이는 먹었지만, 고등학교에 갈 생각은 요원했다. 그러는 사이, 부모님은 자신들의 위치와 나의 사정을 헤아려, 그간 아빠가 3년 넘게 체류하고 있던 쿠웨이트로, 온 가족 이민을 결정했다.

“한국보다 자유로울지도 몰라.”

아빠가 말했다.


쿠웨이트에 가면서 오히려 터무니없는 환상이 심해졌다. 쿠웨이트는 사막이고 말할 수 없이 건조했다. 흙(모래)이 푸슬푸슬했고, 사방팔방 날아다녔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오후 2시면 정신을 잃었다. 과연 ‘씨에스타’의 원산지, 아라비아 반도였다.


학교는 영국식 국제학교에 갔다. 빨간색 스웨터와 체크무늬 치마를 입었다. 랭귀지 코스 없이 바로 9학년(봄학기)으로 입학했다. 이번엔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채로 인형처럼 교실에 앉아있었다. 나는 익숙한 대로 재빨리,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음’의 낭만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거대 호랑이를 상상했다. 교실에서 영어 테러를 당하고 있는 나를 납치해줄 호랑이가 있다면…. 그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교실 유리창을 깨부수고 들어온다. Far-east에서 온 나를 선택하여 호박색 두 눈으로 가만히 응시한다. 부드러운 등에 나를 태우고 멀리 날아간다. 학교 앞 사막을 건너고, 8차선 도로를 건너고, 아라비아 만을 건너고,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을 지나고, 타클라마칸 고원도 넘어서 멀리- 멀리- 간다. 먼 동쪽 끝까지 간다. 인적 없는 깊은 침엽수림까지. 그곳엔 축축한 검은 흙과 거대한 나무가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다.¹ 검은 바위에 내려앉는다. 물소리, 시냇물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는 오래 내 곁에 앉아 있어 준다. 아무것도 성공해본 적 없는 내 인생이 불쌍해서 함께 울어준다.


물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미성년자인 이상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엄마 아빠에게 대드는 것이 전부였다. 인생이 참을 수 없이 시시했다. 모든 유리창이 멀쩡하게 끼워져 있는 학교도 시시했고, 그런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 자신도 시시했다. 점점 좀이 쑤셨다. 자꾸 가출 생각이 났다.


쿠웨이트에서 내 또래들의 삶은 종족별로 달랐다. 청소년 낙타는 낙타 시장에서 사고 팔렸다.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에서 온 여자 청소년들은 메이드,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국제이주) 가사 노동을 하곤 했다.² 흑인 남자 청소년들은 청소를 하고 짐을 나르고 벽돌을 쌓았다.³ 인도인 청소년들은 쿠웨이트에 있는 중산층 인도 학교에 다녔다.⁴ 쿠웨이트인 청소년들은 학비를 100% 지원받는 국립 쿠웨이트 학교에 다녔다.⁵ 유럽, 미국인이나 아랍인 청소년들은 학비가 가장 비싼 국제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인데 학비는 한국의 대학에 맞먹을 정도로 비쌌다. 아빠가 다니는 삼성SDS라는 회사가 그 비싼 학비를 대줬다. 그 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쿠웨이트의 상류층이었다.


그 애들이 시시해 보였다. 부모 잘 만나서 비싼 학교에서 물리, 화학, 생물, 수학, 영국사, 아랍어나 배우면서 사는 애들. 그런 애들이 뭘 알겠어? 나랑 뭐가 다르겠어? 반면에 자기 몫의 밥벌이를 하는 필리핀인 청소년은 대단해 보였다. 독립적인 존재 같았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불법체류자라는 것을 들켜서 본국으로 강제 소환되면, 또 다른 곳으로 가서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는 볼살이 통통한 아랍인 애들이나 서양인 애들과는 다르게, 인생 철학이 있어 보였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하듯이,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귀농을 꿈꿔보듯이, 돈 없는 사람이 부자의 삶을 부러워하듯이, 단조롭게 살아온 사람이 고생을 겪어낸 사람의 카리스마를 동경하듯이, 나는 필리핀인 아이들, 흑인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돌아다니는 인생, 그들이 겪는 모험이 부러웠다.


가출하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았다. 쿠웨이트를 탈출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일단 육로로 탈출할 방법은 없었다. 쿠웨이트는 삼각형인데, 한 면은 바다였고, 한 면은 사우디아라비아, 한 면은 이라크에 막혀 있었다. 두 나라 다 쿠웨이트와 적대국이었다. 가능한 탈출 방법은 두 가지.


1번. 배를 탄다.

2번. 비행기를 탄다.


물론 2번이 가장 쉬웠지만,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남은 것은 1번 뿐이었다. 쿠웨이트에서 한국으로 가는 여객선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지 요새 누가 배를 타고 가겠는가. 한국에서 쿠웨이트로 오는 화물선은 있었다. 쿠웨이트로 이사했을 때 우리 집 침대, 책상, 책꽂이, 책, TV 등등도 한 달 동안 배로 옮겨졌다. 그렇다면 한국으로 가는 배도 있지 않겠는가.


곧장 한국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배 타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도 되지 않았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닐 것 같았다. (실은 매일 걸어가는 꿈을 꿨다) 나는 차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었다. 람보르기니와 페라리가 질주하는 속도 위반의 왕국 쿠웨이트에서 차를 운전하고 싶지도 않았다.⁶ 배를 타는 것도 무리였다.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만약 납치 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누군가에게 끌려간다면... 더러운 성폭행을 당하고 사막에 버려진다면... 죽게 될까? 내가 죽지 않고 모험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죽기 전에 필사적으로 달아나야지. 사막에서... 사막으로... 달아나고 또 달아나야지. 그러다가 장기 매매 상인들에게 발각된다면? 어쩔 수 없이 끌려 가겠지. 그들이 장기 매매 상인들이 아니라 인체 실험을 하는 아랍 테러 분자들이라면? 어쩌면 나는 동남아시아의 창녀촌으로 끌려갈지도 몰라. 나에게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동양인 여자애의 가격이 매겨지겠지. 거기서 달아난다면... 달아나고 또 달아나서 결국 살아남는다면...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십 대는 훌쩍 지나가 있고 내 나이가 서른쯤 되어 있다면... 그럼 글을 쓰는 거야! 내가 겪은 파란만장한 경험을 다 모아서 《파이 이야기》 같은 소설을 쓰는 거야. 하하! 사막 빛, 쿠웨이트 빛, 모래 빛 상상이었다.


동물은 ‘어딘가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친다. 자기가 지내는 곳에서 무언가가 공포를 불러일으키면 (적이 침입해오거나 우두머리 동물이 공격해오거나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오면), 도피 반응이 일어난다. 동물은 탈출하거나 탈출을 시도한다. [...] 탈출한다는 것은 아는 장소에서 미지의 장소로 간다는 것인데, 동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미지의 장소다. 탈출한 동물은 흔히 처음 안정감을 느끼게 된 장소에 숨는다.

- 얀 마텔, 《파이 이야기》, 2001, 59~69p


¹ 생명이 저절로 자라나는 검은 흙은 사막인 쿠웨이트에서는 찾기 힘든 흙이다. 한편, 쿠웨이트에서도 일부 오아시스 지역에서는 대추야자를 경작한다.

² 한편 필리핀학교도 있고 중산층 필리핀인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국제학교에도 필리핀인 친구가 있었다. 그와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랍인들보다 눈이 작아서?) 내 동생도 인도네시아인 친구, 말레이시아인 친구와 가장 먼저 친해졌다. 학교에 일본인이나 중국인, DPRK인은 없었다.

³ 그들은 어디서 왔을까? 북아프리카? 교류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⁴ 쿠웨이트는 인도인이 쿠웨이트인보다 많은 나라다. 인도인들은 의사 등 전문직을 가진 중산층에 해당한다. 당연히 인도인만 다니는 인도인학교도 있다. 내가 다니던 영국계 국제학교에도 인도인이 있었다.

⁵ 쿠웨이트는 오일머니 복지가 세계최고다. 물론 시민권자에게만

⁶ 버스에 대해서는, 동양인 여자애인 나에게 절대 혼자 타지 말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생각조차 안 했던 것 같다. 쿠웨이트에 간 이후에는 용돈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학교와 집 외엔 두문불출했다. 용돈에 대한 수요가 없었으므로 공급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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