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 모음 2023 봄 : 목,소리] 울음도 통역이 되나요 - 다울

울음도 통역이 되나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이 집에서 흰색과 주황색 털을 가진 고양이 아지가 운다. 엄청 운다. 코에서 턱까지 일본식 카레 색 얼룩이 있어서 꼭 원숭이 같아 보이는 고양이다. 아지를 데려 온 친구 C는 14년째 끊이지 않는 이 울음소리에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지는 아주 어릴 때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 때문에 파양당한 경험이 있다.
C는 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무 작대기 들고 다니면서 일장 연설하는 할머니 같아. 그렇다고 남한테 해코지 하는 건 아닌...” 아지는 보통 외옹외옹하면서 양이나 염소처럼 우 는데 어떤 때는 아웅아웅 하면서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아지가 아웅아웅 하는 목소리를 낼 때면 꼭 교회에서 읊조려 기도하던 이가 방언을 터뜨리는 것처럼 낯설다. 인터넷상의 고양이 박사님들에 의하면 그렇게 울부짖는 것은 불안하거나 아프거나 심심하거나, 하여튼 뭔가 불편해서 그렇다고 한다.
고양이 아지는 아침이면 친구 C와 내 몸에 얼굴을 비비며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다. 밥을 달라는 거다. 털이 빼곡한 짐승이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벼대는 게 매우 기쁘다. 이렇게 기 쁜 일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 그렇다. 어떤 때는 모터 소리를 내며 누워있는 내 얼굴에 자기 궁 둥이를 붙이고 앉는데, 웃기면서도… 감사한 심경이 된다. 하지만 귀가 아프다. 아지의 목소리가 푹신푹신한 귀마개를 뚫고 귀를 찌른다.
침대에서 일어나 비몽사몽인 채 사료를 붓는다. 이 집에는 나 말고 피아니스트 두 명과 드러머 한 명이 함께 사는데 다들 아지의 울음소리에 연주를 방해받는다. 하지만 고양이 아지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모두들 차마 화는 내지 못하 고 한숨을 푹 쉬며 아지에게 말이나 한번 걸어본다.
피아니스트들과 드러머가 출근하거나 등교하면 이 집에는 나와 아지의 돌림 노래만 남는다. 창문 밖으로는 앞집에 사는 형제가 비비탄을 가지고 노는 소리, 프랑스어로 유추되는 언어, 영어, 내가 식별할 수 없는 언어,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철로 만든 무겁고 높은 대문이 쾅 하 고 닫히는 소리, 앰프에 연결한 베이스 기타 연습 소리가 들린다. 낯선 나라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들은 귀에 잘 채이지 않고 주로 고양이 아지의 울음소리가 귀를 가득 채운다.
나는 혼잣말이 많다. 만성통증질환을 갖게 된 뒤로 더 그렇게 됐다.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작 가이자 미술가, 음악가, 점성술사 요한나 헤드바는 자신의 만성질환을 두고 ‘삶이 그저 에너지를 배급하는 것으로 전락한다는 것’¹이라고 썼다. 정말 그렇다. 점심도 되기 전에 에너지 가 바닥난다는 것도 딱 내 얘기 같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자주 못 만나게 되었고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으면 돌아버리기에 딱 좋아서, 혼잣말이 많아졌다.
그런 이유로 낮 동안 집에 남은 아지와 나는 곧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를 나누었다기보다 특정 주파수를 주고받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서로에게 이야 기하기보다 각자 떠들어댔다. 물론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아지가 배가 고프다고, 어서 밥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분명히 인지한다. 함께 누워 있다가 몸을 뒤척이면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만 좀 풀썩거리라고 눈치를 주는 것도 잘 안다. 고양이 아지와 14년을 함께 한 친구C는 아지와 훨씬 더 많은 대화를 할 줄 안다. 서로의 언어를 경험으로 습득한 것이다. 하지만 친구 C도 여전히 고양이 아지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울음소리는 말로 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창밖으로 들려오는 외국인의 언어처럼 흘려들을 수 가 없다. 자꾸만 귀를 붙잡는 것이다. 울음은 만국 공통어임과 동시에 누구도 정확히 통역할 수 없는 외국어 같다. 누군가 ‘비극은 외국어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 ²그러니까 울음은 외옹이나 아웅이나 엉엉이나 멍멍 또는 흑흑처럼 의성어로 표현할 수 있고, 또 대부분의 사람 들은 그것이 울음소리라는 것은 인지할 수 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의 귀는 울음 소리를 쫓아, 누군가의 생존 본능을 감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울음소리는 날카로운 소리로 무언가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심장이 막 조여온다. 가족이 함 께 살던 집에서 잠깐 쫑이라는 이름의 개를 키웠을 때, 나는 그때도 자주 집에 혼자 있었다. 거실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다 보면 쫑이가 종종 현관문을 향해 마구 짖었다. 그러면 갑작스 레 거실의 천장 등이 너무 희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밝은 빛이 나를 찌르는 것 같았다.
고양이 아지의 울음이 울려 퍼지는 이곳은 다행히 불빛이 모두 노랗다. 밖은 몹시 흐려 어두 컴컴하다. 친구 C는 고양이 아지에게 말한다. “누가 들으면 아주 밥 굶기는 줄 알겠어! 도대 체 뭘 원하니?” 아지는 주로 사료가 든 플라스틱 리빙박스에 이마를 비비며 울지만 자기 엉 덩이를 내 얼굴에 붙이고 행복으로 골골 소리를 내면서도 목청껏 우는 녀석이다.
그렇게 목이 쉴 때까지 우는 고양이 아지를 보면 기억나지 않는 나의 갓난아기 시절과 그 시 절의 엄마가 생각난다. 나도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한다. 울고 또 울어서 어려서부터 성대결절 이 왔다. 내 목소리는 오랫동안 허스키해서 남자 같다는 놀림을 수시로 받았다.
고양이 아지를 통해 속죄하는 기분이 든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이모들은 이십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보기만 하면 “가시내 징그럽게 울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린 내게 무슨 죄가 있을까! 그저 고단했을 엄마에게로, 그리고 고양이 아지를 키우는 친 구 C에게로 거대한 연민이 쏟아질 뿐이다.
“누가 들으면 엄청나게 세게 꼬집는 줄 알겠어! 도대체 뭘 원하니?” 엄마는 이렇게 말하며 속수무책으로 갓난 나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태어난 해는 90년만에 찾아 온 폭염 으로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급조한 건물에 살던 우리 네 가족은 옥상에 텐트를 치고 잠에 들었다. ‘땡벌’이라 불리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기록적인 열대야 속에서 울려 펴졌다. 공격적이고 지독하기로 유명한 땡벌, 쿠데타를 일으키는 몇 안 되는 곤충이라는데…
도저히 꺼지지 않는 사이렌처럼, 기관총을 쏘듯 침을 쏘는 지독한 땡벌처럼 울던 갓난아기는 다닥다닥 붙어 사는 이웃들의 신경을 자극했다. 옆집은 기록적인 더위에도 화가 나 문을 꽝 닫고 에어컨을 구매했다. 당시에 에어컨을 구매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엄마는 이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를 업고 밖을 나섰다. 새벽 내내 학교 운동장을 돌았고 비가 오는 날은 맨발로 질척질척해진 운동장을 돌았다. 변기에 앉아 용변을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방을 물걸레질할 때도 엄마는 나를 업고 지냈다. 다른 누가 안으려고 하면 갓난 나는 세게 발버둥을 쳤다. 엄마의 허리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았다. 아이가 왜 이렇게 우는지 알고 싶어 텔레비전에도 나온 유명 의사를 찾아갔 다. 피를 뽑으려고 아기였던 나의 발 뒤꿈치에 주사를 놓았는데, 엄마는 그 발뒷꿈치에 맺힌 콩알만 한 핏방울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내 똥 냄새를 좋아했다. 건강한 똥을 싸는 것만으 로도 기뻤다. 참고로 고양이 아지에게서는 고약한 수산물 냄새가 나는데 아지와 지낼수록 나는 그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다.
엄마는 내게 심각하지 않은 병이 있기를 바랐다. 꼭 그래야 했다. 병만 고치면 끈질긴 울음과 조바심, 아이와 이웃을 향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리라. 까맣게 변한 허리에 안식이 깃들게 되리라.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이가 이렇게까지 우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이 아이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에도 나온 유명 의사는 말했다. 예? 뭐라고요? 그럴 리 없어요. 엄마는 실망스러운 표정과 의문을 숨겨야 했다. 왜냐, 엄마니까! 유명 의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예민하게 태어났을 뿐입니다.”
예민하게 자란 아이는 커서 완전히 똑같은 일을 마주한다. 한 차례의 기록적인 추위를 겪고 손목부터 턱까지 마비가 된 것같이 아파 입이 잘 벌어지지 않을 때 나는 물었다. “의사 선생 님, 저는 왜 이렇게 아픈건가요?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건가요?” “아무 이상 없어요. 예민 하게 태어나서 그래요. 예민하게 태어나서….” 그렇게 아무 이상이 없는 채로 나는 오랫동안 아픈 몸을 살고 있다.
그러니까 세상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의료 차트에 오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고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다.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나를 둘러업고 맨발로 운동장을 걷던 엄마의 고생에도, 땡벌 같은 아이의 울음에도 마땅한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 비가시화, 그런 한자어가 떠오른다.
울음소리는 분명 환영할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개의 울음소리를 최소화 하는 짖음 방지 목걸이가 성행하기도 했다. 누군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라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아이라면 들어갈 수 없는 장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나 고양이, 아이는 어딘가로 유배되거나, ‘모두가 네 울음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학습시켜야 한다.
잘 학습 받고 자란 어른들은 자주 숨죽여 운다.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순간, 끝이다! 고 양이 아지처럼 하염없이 울면 직장도 잃고 친구도 잃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복슬복슬, 부슬부슬하게 꽉 찬 털도 없고 똥 냄새마저 향기롭게 느껴지는 갓난아기만큼 귀엽지가 않기 때문이다. 긴 울음은 아이조차 징그럽게 보이게 하는데 어른이면 오죽할까.
대표적으로 내가 그렇다. 우는 게 너무 쪽팔려서 혼자 운다. 몸이 아프다고 말하는 건 이제 좀 익숙해졌지만, 그것도 ‘섬유근육통’이라는 이름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난치 질환의 명칭 을 얻어 낸 뒤부터다. 아프다고 말하면 당신과 노동하거나 유희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최대한 참은 다음 집에 와서 엉엉 울고 끙끙 앓는 것이다.
하지만 울음은 터지는 종류의 것이다. 간지럼을 태웠을 때 폭소를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더이 상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성질을 지녔다. 조용히 울던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불안 발작을 일으킨다. 전철에서, 회사에서, 방송국에서, 자취방에서 고양이 아지가 아웅아웅하고 늑대처럼 울부짖듯이, 읊조려 기도하던 이가 방언을 터뜨리듯이 그렇게 터지고 만다.
징글맞은 울음소리는 ‘이상 없음’에 반기를 드는 신호탄이다. 위험을 알리는 목소리이다. 우리 엄마가 엄마라서 자신의 허리가 까맣게 변할 때까지 나를 업고 다닌 게 이상하고 내가 땅벌처럼 운 게 이상하고 고양이 아지가 끝없이 우는 것도 이상하고 아파트에서 위로 아래로 빼곡하게 엄청 많은 동물과 사람이 함께 지내는 것도 이상하고 울음 방지 목걸이도 이상하고 노키즈존도 이상하고 아주 많은 어른이 숨죽여 우는 것도 이상하다.
십이년 째 끈질기게 우는 고양이 아지여, 그대의 굳은 심지에 존경을 보내리. 당신은 선구안을 가 진 우리 시대의 선구자입니다. 고양이 아지를 사회자로 세우고 천하제일 울보 대회를 열자. 축하 무대로는 울음의 화음을 쌓자. 서로가 양반의 장례 때 품삯을 받고 주인을 대신해 곡을 하던 ‘계집종’, 곡비가 되어 줄 것이다. 자신의 유일무이한 언어, 타인에게 영영 외국어인 언어로 소리를 높이자. 보이지 않는다면 들리게 할지니.
¹요한나 헤드바, 한지우 번역 <아픈 여자 이론>, OFF 매거진.
² “TRAGEDY IS A FOREIGN COUNTRY. WE DON'T KNOW HOW TO TALK TO THE NATIVES”네드 벤슨 감독 <엘리노어 릭비 : 그 여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