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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26호 순간들, 장면들] :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 다울

최종 수정일: 2022년 1월 26일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종종 시궁쥐에 대해 말했다. 내가 태어나기 20년 전에, 대대적인 쥐잡기 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은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늘 신기했다. 구전 설화로 내려져 오는 먼 조상의 이야기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파트 키드로 자란 나로서는 쥐 오줌으로 얼룩진 천장과 쥐덫 같은 사물이 낯설었다. 어린 시절의 부모님은 천장에서 쥐들이 찍찍대며 우당탕 달리는 소리에 자주 잠에서 깼다. 아침에 일어나면 쥐덫을 확인하고 쥐똥을 쓸어내는 것이 일이었다. 쥐는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조상들에겐 훌륭한 단백질원이었을지 몰라도 농부와 그들의 자녀에게는 숙적이었다. 국민학교에서는 쥐의 꼬리를 제출하라고 했고 아빠는 칡 줄기에 재를 발라 선생님을 속이곤 했다. 학교에서는 또한 ‘멸공’을 슬로건으로 내건 반공주의 포스터와 함께, 쥐의 ‘박멸’을 강조하는 포스터를 그리게 했다.


나는 십 대 시절 집을 떠나 시골 마을의 기숙 학교에 다녔다. 그곳의 식당이나 밭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발 빠른 쥐들을 마주치곤 했다. 긴 꼬리를 흔들며 바닥을 내달리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식당에는 빗자루나 대걸레를 들고 소탕 작전을 펼치는 이들과 소리를 지르며 의자나 식탁으로 뛰어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겁이 나면 이를 꽉 깨무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무음으로 식탁 위를 오르는 편이었다. 기숙 학교에서는 열일곱 살이 되면 일종의 성장 의례로 3개월간 인도 여행을 보냈다. 인도에선 쥐는 물론이고 도마뱀이나 빈대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신을 섬기는 그곳 사람들은 정말 많은 것에 기도를 올렸다. 나는 그들을 따라 맨발바닥으로 각종 신의 사원을 거닐었다. 어느 날엔 사원을 다 걷고 신발을 신던 중 아주 인상적인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매우 작고 맨들맨들 한 구멍 밑의 매우 작은 접시였다. 그 접시는 알고 보니 쥐를 섬기는 사람들이 쥐에게 먹이를 주는 접시였다. 접시에는 거품이 섞인 흰 액체도 있고 잘게 부서진 빵조각 같은 것도 있었다. 그 옆에서 나풀거리던 주황색의 꽃잎들은 그 작은 공간에 성스러움을 더해주었다. 그것을 본 일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멀끔한 출입구와 우아한 식사들은 쥐를 징그럽거나 교활한 이미지가 아닌 인자하고 명석한 이미지로 만들어주었다. 그 이미지는 앞일을 점치거나 길 안내를 했다던 삼국유사 속의 쥐를 떠올리게 했다. 정성스레 준비된 양식을 취할 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싶었다. 내게 있어 쥐는 이미지 변신을 수시로 감행하는 동물이었다. 그들이 페스트균을 옮기며 인류를 죽음으로 몰던 시대, 한국의 대대적인 쥐잡기 시대, ‘미키마우스’와 ‘라따뚜이’의 시대가 이리저리 머릿속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도시 생활을 재개하면서 부터는 쥐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에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을 만큼 그 존재가 잊혀갔다. 도시에서 쥐를 처음 본 것은 기숙 학교를 졸업한 지 삼 년 만의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길에 내 검지 손가락 한마디만 한 작은 쥐가 회양목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몸집이 워낙 작아 이번엔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새 같기도 한 것이 여차하면 데리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털이 거의 없는 얇고 긴 꼬리가 내 목덜미의 털을 곤두세우게 했다. 엄마는 50년이 지나도록 쥐의 꼬리를 밟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모골이 송연하다고, 그러니까 털이 쭈뼛 설 정도로 끔찍하다고 했다. 많은 외계인 영화들이 털 없는 동물에 큰 빚을 지지 않았을까? 영화 <에일리언 1>의 에일리언은 문어 같기도 하고 지네 같기도 하고 꽃게 같기도 한 것이, 아무래도 털의 부재는 귀여움을 더는 것 같다.


조금씩 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줌을 당긴 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칵 소리를 내는 순간, 쥐는 발 빠르게 어디론가 숨어 없어졌다. 깜짝 놀라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사진에 담긴 것은 너무 빨라서 늘어져 버린, 작고 검은 뭉텅이였다.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목덜 미가 조금 간지러운 동시에 약간의 애착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이가 사진을 보았다면 목덜미가 간지럽기는커녕 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터였다. 하지만 쥐는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어디론가 부지런히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시에서 살며 쥐를 종종 마주쳤지만, 부모님 세대의 증언에 비하면 적은 수였다. 여전히 쥐는 혐오 동물이지만 그 또한 부모님 세대에 비하면 위상이 하락한 것 같았다. 현시대의 쥐들은 어디 에 있는가에 대해 궁금했다. 그에 앞서 쥐의 개체 수가 궁금했는데 질병관리본부도 환경부도 농림부도 더 이상 모니터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쥐에 관하여 어느 곳보다도 빠삭할 것 같은 곳에 문의 글을 남겨 보기로 했다. 쥐﹒해충 박멸 업체였다. 그 업체는 홈페이지의 친절한 QnA 답변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있는 모양이었다. 직접 접속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과연 친절했다. 비록 오래전 게시물이었지만 해충에 관한 시답잖고 흥미로운 질문에 성실한 답변이 달려있었다.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은 답변도 있었으나 친절한 것은 여전했다. 이를테면 “개미가 매직을 싫어하는 게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변 이 달리는 식이었다. “볼펜으로 선을 그어 개미를 가두면 유황 냄새 때문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선을 따라 계속 돈다는 TV 실험 결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미가 죽기 전에는 선을 넘지 않을까요? 스스로 한계의 선을 긋고, 넘지 못한다고 주저앉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재밌고도 오지랖 넓은 답변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회원가입을 하고 쥐의 개체 수 감소 혹은 증가 추세에 관해, 도심에 사는 쥐의 서식지에 관해 질문을 올렸다. 그러자 사흘 뒤 정성스러운 답변이 달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장에서 쥐를 잡고 있는 연구원입니다.” 인상적인 첫 문장이었다.


답변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질병관리본부와 함께 대대적인 쥐 개체 조사를 진행하고 있진 않으나 저희가 서비스하고 있는 곳에서 약제를 섭식한 흔적과 활동 흔적(족적, 이동 흔적, 서식처, 갉은 흔적 등)을 확인하고 포획된 개체 수 등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당사의 기록을 보니 2010년 쥐 관련 모니터링이 20만 건, 최근 2020년의 기록은 50만 건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증가는 쥐의 계속적인 증가라기보단, 당사의 점검 및 기록이 더욱 정밀해지고 고객이 늘어나며 증가한 것으로 사료 됩니다. 다 만 위의 수치가 시사하는 바는, 쥐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심지라고 해 서 쥐가 시골보다 적을 것으로 생각하실 수 있으나 서울과 부산의 중심 지역들이 쥐 문제가 많은 곳으로 파악됩니다. 노후한 건물에는 예전에 설치했던 후드 시설 전기배선, 에어컨 배관, 가스 배관 구멍, 천장 등에서 외부에 살던 쥐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고객센터로 무료 방문 상담을 접수해 주시면 가까운 지사에서 방문하여 진단 및 상담을 드리고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무척 성실한 답변이 돌아와 기뻤다. 고객 응대만 따로 담당하는 상담원이 답을 줄 것으로 예상 했는데 쥐를 잡는 연구원이 직접 답을 준 것도 신기했다. 답변도 재미있었다. 그들 말에 따르면, 쥐들은 그간 너무나 은밀하고도 빠르게 움직이느라 내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이곳 저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프레임 안에서의 빠른 이동 탓에 형체를 잃어버렸거나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쥐를 박멸하는 업체인 만큼 영업을 위해 스리슬쩍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쥐의 특성을 조금만 알아 보아도 쥐를 ‘완전 박멸’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도심에서 그 들 스스로 수를 불려나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인상적인 QnA 답변을 받아 들고는 며칠간 쥐에 관해 찾아 읽었다. 쥐가 다산의 상징인 것은 알았지만 수명인 3년 동안 이백 마리까지 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영하 40도에서 영상 60도까지면 어디서든 번식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그들이 생존에 능하다는 것 또한 익히 들어왔지만 내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고 쉼 없이 1km를 수영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게다가 의리와 동정심으로 똘똘 뭉친 이 동물은, 도움을 줄 때 특별한 냄새 분자를 뿜어낸다고 한다. 그 특유의 냄새로 상호 보답의 약속 도장을 받아내는 것이다. 길에서 어른을 만나면 피해갈 정도로 장유유서도 지킨다던데 이렇게 강한 번식력과 생존력 이라면 한강변이나 ‘고급 아파트’의 분수에서 쥐가 발견되었다는 뉴스 는 그리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쥐들의 종 잡을 수 없는 이미지 또한 그랬다.


문득 쥐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상상 속의 나는 2021년의 서울 쥐이며 열두 마리의 형제들과 새로 태어났다. 전염병 탓에 서울의 거리는 휑하다. 길가의 높이 쌓인 포장 용기 더미로 뛰어들어 꼬리로 딸기 잼을 찍어 먹다가 인기척에 비스킷을 입안 가득 물고 달아난다. 인간의 시야에서, 길고양이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꽁지가 빠지도록 달린다. 반가운 동료 쥐를 발견한다. 우리는 긴 시간 서로의 털을 핥다 아파트 복도를 달리며 인간들을 놀려준다. 그러고는 짧은 고주파로 킬킬 웃는다. 스펀지 같은 발바닥을 달고 리듬감 있게 발을 구르는 소리에 인간은 귀신의 발걸음 소리라도 들은 양 몸을 떤다. 복도 끝에는 한 인간이 깎고 버린 손발톱들이 가지런히 모여있다. 그것들을 깨물어 먹으면 정말로 인간이 될까. 동료 쥐와 하수구 속을 헤엄 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도망치고 숨는 모든 존재들을 생각한다. 세상을 모두 콘크리트로 덮지 않는 이상, 무한정 자라나는 쥐의 앞니는 언제 어디서나 무언가를 갉아대고 있을 것이다. 희고 작은 생쥐들이 실험실에서 인류의 생명 연장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동안 거리의 야생 쥐들은 달음박질하고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인간 박멸의 계획을 도모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 2021년 4월, 사진 잡지 보스토크 매거진의 26호에 실린 글. '붙잡을 수 없는 순간' 이라는 글감을 받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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