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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만화비평] 주체 없는 말풍선 - 아니


ⓒ 오카자키 쿄코 - 리버스 엣지』, 이소담 옮김, 쪽프레스



리버스 엣지의 말풍선은 단단하지 못하고 임시적으로 보인다.

보통 말풍선이 존재해야할 것 같은 안정적인 위치

사각형 칸의 구석자리 네곳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칸이나 인물을 무시하고 존재하는 듯한 말풍선.

말풍선이 무엇보다 우선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말풍선.

단단하지 못하고 임시적으로 보이며 있어야 할 위치를 모르는 듯한 말풍선들은 빈번히 꼬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말풍선의 꼬리는 말풍선 속 대사의 발화자이자 말풍선의 소유 주체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표식이다. 음성만으로 발화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영화와 달리 만화는 언어와 발화자의 관계가 조금 더 느슨한 편이다. 그렇기에 주인 없이 부유하는 언어를 붙잡아 각 발화자가 있음을 표지하는 말풍선, 그리고 누구에게서 발화했는지를 명확히 하는 말풍선 꼬리는 가독성과 이해를 위해 만화에서 필수적이다.

(말풍선이 직접 그려지지 않더라도 문장을 동그랗거나 네모낳게 다듬는 것도 말풍선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리버스 엣지 속 말풍선과 언어들은 빈번히 꼬리 없이 부표처럼 떠다닌다.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만, 의미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발화자가 명확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왜 리버스 엣지의 말풍선은 부표처럼 고정되어 있는 동시에 부유하는 이중적인 인상을 주게 그려져 있는 것일까?

리버스 엣지의 인물들은 짤방화 된 세상을 예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발화의 주체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주체의 개념이 모호해진 것도 한 몫하겠으나 그것은 요즘의 이야기이고,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발화되고 언표된 언어 그 자체와 그로 인한 '나'의 상태 변화인 것이다. 그 언어가 누구에게 발화됐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알 수도 없다.

그렇기에 만화의 시작이 중요하다.

첫번째 컷, 검은 배경에 흰 색으로 쓰여있는 텍스트는 이러하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강이 흐른다.

강은 하구와 꽤 가까워서 넓고 흐름이 정체되어 냄새가 심하다.

개발되지 않고 방치된 강변에는

미역취가

무성하게 자랐고

종종 고양이 사체가 굴러다닌다.

그리고

우리가 다니는

학교도 그 강 바로 옆에 있다."


이 흰 텍스트는 아직 어떠한 인물도 나오지 않은 지점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목소리나 말투 없이 소문처럼 존재한다.


27페이지 첫 컷의 다지마를 둘러싼 말풍선들 또한 그러한 대표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언어를 소유하고 발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흐른다.

나는 우리가 언어의 흐름에 휩쓸려 부유한다고 느낀다.

발화의 주체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인터넷이 보편화된 현 시점의 세계는 그 소문들이 명확하며 한계를 모른다.

소문의 발화자는 명확하지만,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를 익명a라던가 ㅇㅇ(아이피) 혹은 닉네임 등으로 인지할 수 있지만 그가 어떤 얼굴인지 어떤 표정인지는 영영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짤방화된 세계

'나와 주변을 어딘가로 흐르게 만드는 언어의 출처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영영 알 수는 없는 그러한 세계'

리버스 엣지는 묘사하고 있다고 느낀다.


꼬리없는 주체없는 고정되어 있으면서 부유하는 이중적인 인상의 말풍선이 그려진 이유는 위와 같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반응 하면 될 일이다.

그건 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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