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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면 아니되죠 - 온자


'회뜨기'는 버드나무의 전라도 방언이다.





아주머니! 지금은 어느 땅 밑에서 그 새파랗게 치뜨던 눈과 욕설을 담고 있던 입을 다문 채 쉬고 계시는지요.

고향을 떠난 지 하세월이라 전 사실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는지, 어떠신지 잘 몰라요. 얼추 생각해 보니 돌아가실 나이가 지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아주머니의 집은 네모난 저희 집 귀퉁이 쪽에서 사선으로 아래쪽이어서 개구멍을 통과하면 쉽게 갈 수 있지만 가끔은 마음을 바르게 먹고 앞집을 돌아서서 가는 날도 있긴 있었지요. 하지만 아주머니댁 대문으로 들어갈 때는 이상하게도 눈치가 보이곤 했었지요. 뭔지 환영받지 못한다는 그런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아주머니 댁에는 네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저는 저와 동갑인 봉숙이와 한 살 위지만 오히려 더 친한 용숙이언니만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작고 퉁퉁하며 욕심이 많고 성질이 별로 안 좋은 아주머니도요.


제가 어린 시절 보고 겪었던 아주머니를 생각하며 이런 편지를 쓰게 되리라고는 사실 저도 생각 못했어요


그러나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히 있지요. 그것은 바로 아주머니에게 제가 사과를 받아야 하지만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안 되기때문이예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제 속이 조금은 개운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지금쯤 돌아가셨거나 그게 아니면 이제 곧 돌아가실 날이 가까이 와 계시는 아주머니!


만약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힘도 별로 없고 기억도 확실치 않으신 게 분명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어린 시절 아주머니에게 뺨을 아주 세게 맞았던 것만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답니다.


우리는 둘이나 셋이서 자주 아주머니댁 뒤안의 울타리 근처에서 놀곤 했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텃밭과 장독대가 있었으며 소꿉놀이하기에 적당한 풀들과 사금파리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허술한 울타리 곳곳마다 개들이 드나드는 구멍들이 있었는데 몸집이 작은 우리들도 그곳을 종종 이용하곤 했지요 .


그곳을 빠져나가면 우리보다 어리지만 자주 놀곤 했던 정란이네 앞마당이 있었어요. 그곳에는 꼬리로 파리를 쫓으며 방금 먹었던 것을 되올려 우물거리던 어미소가, 개구멍을 오고 가는 우리를 커다란 눈망울로 껌뻑거리며 바라보곤 했지요


어느날 저는 아주머니의 셋째 딸인 용숙이 언니와 짚 울타리 곁에 서서 마치 웃기 대회라도 벌인 양 웃고 있었답니다. 아마 그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었거나 방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어서 웃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나 둘 중 한 명이 웃기 시작하자 상대편이 그 웃음이 웃기다며 웃기 시작했고 그 말을 듣고 "네 웃음은 더 웃겨!" 하며 우리의 웃음은 도통 끝이 나질 않았습니다.


요즘 말하는 웃음 치료라는 것을 우리는 그 당시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웃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뱃가죽은 무척 당겼습니다. 우리의 웃음소리가 다른 아이들보다 유별나긴 했습니다. 그 부분은 정말로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저는 언니의 까르르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동글동글 연거푸 싸대는 토끼 똥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웃음소리는 언니에게 어떻게 들렸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저는 제 웃음소리가 우스워서 제가 웃는 소리를 제 귀로 들으며 다시 웃기도 합니다. 저의 딸조차 제가 티브이를 보며 별거 아닌 걸로 심하게 웃고 있을 때 가장 웃긴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날 우리의 끝도 없는 웃음소리를 듣다 못해 아주머니가 뒤안으로 나있는 방문을 밀어제치고 뛰쳐나와 저와 언니의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그것도" 이년들이 회뜨기를 삶아 먹었나. 왜 이렇게 미친년들처럼 웃고 지랄이야!"하면서 말이죠. 아주머니는 아마 그날을 까마득히 잊으셨겠지요?


참으로 기분이 좋았고 즐거운 시간이었지요. 그러나 우리의 좋았던 기분은 고추보다 매운 손아귀로 인해 갑자기 연한 가지가 톡 꺾이듯 꺾여져 버렸습니다. 웃고 있던 얼굴에는 얼얼한 뺨따귀의 맛과 함께 작은 눈물방울이 이슬처럼 맺혔지요.


저는 그날의 아픔과 충격이 너무나 강렬해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어쩌면 아주머니의 그 세찬 뺨 세례가 없었다면 나와 용숙언니는 나중엔 정신을 못 차리고 웃다가 발을 헛디뎌 개똥이나 소똥 위에 넘어져 다쳤거나 옷을 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해 주시기 위해서였다면 아주 감사한 일이겠지만 저는 왠지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군요.


저 또한 아주머니처럼 언젠가는 땅에 묻히고 언젠가는 잊히는 존재가 되겠지만, 저는요! 두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듣기가 싫다며 뺨을 때리는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저의 어린 시절은 동네 친구 집의 울타리 쪽에 심겨진 과실 나무들이 마치 저의 집 것인 양 그것들을 따먹었었지요. 뽕나무가 있는 친구 집에서는 그 뽕의 열매가 다 없어질 때까지 까맣게 입과 치아에 물이 들 때까지 따먹기도 했고 복숭아, 살구, 앵두또한 그랬습니다. 저희 집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는데 늘 친구들을 불러다가 떨어진 감꽃을 주우며 목걸이를 만들곤 하였고 자주 감으로 배를 채우기도 하였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만은 오직 자기 집에만 자두나무가 있는 점을 이용하여 어린 우리에게 돈을 받고 나서야 따주었답니다. 지금이야 시골 인심이 좋지 않게 되어 웬만한 마을의 과실 나무를 쳐다보기조차 망설여지지만, 그때 당시 그런 집이 어디 있었답니까? 오직 아주머니만이 그런 짓을 서슴지 않고 하셨습니다. 저는 자두만 보면 아주머니 생각이 나서 지금도 잘 사지도 않을뿐더러 일 년에 한 번도 안 먹고 지나간 적도 많습니다.


어린 마음을 동심이라고 하잖아요. 그 동심에 상처를 내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갈취한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동네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긴 세월 살아보니 세상에는 당신같은 사람이 어디에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네요.


저는 아주 오래전에 고향을 떠나 이제 고향에서 지냈던 날보다 타향에서 살아온 날이 훨씬 더 많아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누군가에게 너무 웃어댄다며 뺨을 맞은 일은 없으니 그럭저럭 좋은 이웃들을 만나 살아온 것 같네요.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주머니 덕분이긴 하네요. 그런면에서 볼 때 아주머니의 그런 행각은 참 의미가 있긴 있었네요.


제가 만약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게 된다면 울타리 대신 온갖 과실 나무를 심고 그 나무마다 '이 나무 그늘에서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면 이곳에서 드시는 모든 과실은 공짜입니다.' 라는 팻말을 달고 싶습니다. 여유가 있다면 아이들이 넘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두꺼운 깔개라도 깔 생각입니다. 오래된 벚나무의 두꺼운 가지에는 그네도 하나 매달아 놓을까 합니다.


마침내 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그 나무 아래에 수목장으로 묻힌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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