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릿, 클래식] ➁ - 의미



ⓒ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대만판 포스터



우리 집에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오게 된 건 내가 열세 살 떡국을 먹기 며칠 전이었다. 피아노가 들어옴과 동시에 내 방은 곧 피아노만을 위한 방이 되었다. 다른 어떠한 가구도 둘 수 없을 만큼 피아노는 크고 비쌌다.

당시 피아노를 전공하는 어린이들은 두 부류였다. 영재원 다니거나 그렇지 않거나. 영재원 소속 애들은 자기네들끼리 붙어 다니며 이런저런 어른 같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곤 했다. 이번에 랄라 교수가 심사위원이래. 저번 콩쿠르 때 심사 봤던 그분. 내가 이번에 룰루 한의원 청심환을 먹어봤는데 엄청나게 잘 먹더라고. 연습실 혹은 대회에서 종종 목격한 그들은 도도하고 기품있어 보였다. 넘치는 재능과 든든한 정보력, 부와 명예를 모두 겸비한 듯 보였다. 영재원은 엄마들끼리도 사이가 두터워 보였다. 카풀로 콩쿠르에 오고 갔고 비슷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보아 숍도 공유하는 듯했다.

어쩌다 나간 대회에서 상을 받아 싼 가격으로 음악 영재 캠프를 가게 되었다. 스키장이 있는 리조트에서 겨우내 피아노를 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스키장에 홀려 선뜻 가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모르는 얼굴은 없는 캠프였다. 대회에서 오가며 지나쳤던 애들,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애들로 딱 백 명이 채워져 있었다. 강당은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그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애들은 전부 영재원 소속 애들이었다.

연습실은 총 열 개였다. 두 개의 큰 연습실에 그랜드 피아노, 나머지 여덟 개 방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구비돼있었다. 연습실 예약은 매일 선착순이었다. 큰 연습실은 아침 배식 전이면 예약이 끝났다. 아침잠 많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나로서는 도저히 예약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히 일어나서 적당히 연습하고 주변을 배회했다. 괜히 연습실 주위를 기웃거리며 다른 애들은 얼마나 어려운 곡을 연습하는지, 실수는 잦은지 확인했다. 확인할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매번 같았다.

바야흐로 배틀의 계절이었다. 때마침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 배틀이 유행가처럼 번졌다. 연습실에선 여러 버전의 쇼팽 에튀드가 들려왔다. 백건과 흑건을 자유자재로 연주하거나 응용해서 완전 다른 곡을 연주하는 애들도 많았다. 듣자 하니 정말 영화처럼 영재원 애들끼리 맞짱 뜨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장소는 강당. 시간은 미정이었다. 누가 주최하는지 누가 참가하는지 몰랐지만 영재원 소속 애들도 그렇지 않은 애들도 이상한 흥분에 휩싸여 여기저기 정보를 캐러 다녔다.


우리도 참가할 수 있는 건가?

밥을 먹다 친해진 영재원 비소속 친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지만 풀 죽은 친구의 목소리에 괜히 억울했다.

점심을 먹고 여느 때처럼 걷는데 강당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몇 명은 소리를 지르고, 몇 명은 응원하고 이내 정적이 흐르더니 쇼팽 에뛰드가 들렸다. 오늘이군. 싶어 밖을 빠져나오려는데 이상하게 복도에 발이 묶여 쪼그리고 앉아 무심코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중계하고 있었다.

아, 1번 선수 잘 가다가 옥타브 미스, 페달 감점, 스케일 미스로군요 총 3점 감점. 2번 선수는 과연.

두 곡 정도 들으니 흥미가 떨어졌다. 매일 이렇게 살고 있는데 굳이 또 이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매점을 들러 아이스크림을 물고 아무도 없는 빈 연습실을 활보했다. 어디 조용한 연습실에 들어가서 몰래 책이나 읽을 작정이었다. (피아노 연습을 할 땐 악보 외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정적이 더 좋았다. 어떤 소리든 시끄럽게 느껴졌다.

가장 먼 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쇼팽인 거 같은데 왈츠인지 에뛰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쇼팽 특유의 낭랑하고 쾌활한 선율이 복도 끝을 조용히 울렸다. 시끌벅적한 강당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살금살금 멜로디 뒤를 밟았다. 두꺼운 방음문이 닫혀 있었다.

큰 창이 나 있는 10번 방 연습실에는 정오의 햇살이 너울거렸다. 볕을 등에 업은 채 집중한 입을 앙다문 남자애가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몸이 기울어지고 왼손 반주가 깊고 웅장해질수록 몸을 한껏 부풀렸다. 한음 한음 굉장히 공들이는 것 같았다. 그 애가 눈을 감아 들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정감과 함께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지랄이네. 눈을 감긴 왜 감아.


당시 교수들이 자주 하는 말이 “음악을 느껴라”였는데 도저히 그 의미가 와 닿지 않은 많은 어린이가 어른 피아니스트들을 따라 과장되게 몸을 움직이곤 했다. 모습은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웠는데, 본인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는 점이 날 불편하게 했다. 나 역시 의미가 와닿지 않는 많은 어린이 중 하나였지만 무작정 어른들을 따라 하고 싶진 않았다. 한 번은 작곡가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겪고 쓴 곡을 연주할 때였다. 목석처럼 딱딱한 몸을 풀어주려 G 선생님은 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완아. 이 사람은 지금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연애하던 사람하고 헤어진 거야. 얼마나 슬프겠어.”

“전 짝사랑도 안 해보고 이별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상상이라도 해봐. 만약에, 너한테 너무 중요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해봐. 이젠 다시 볼 수 없다고. 그럼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엄청 슬플 것 같긴 한데 그 기분이 어떨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

“음… 그러면! 여기 포르테 부분에서는 몸을 크게 써보자. 팔꿈치도 크게 벌리고! 네가 아주 깊은 곳으로 다이빙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맨 처음 선율이 반복되면서 소리가 작아지잖아. 여기서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주해보자.”

처음으로 할 만한 연주였고 들을 만한 음악이었다. 교수는 실력이 그사이 빠르게 늘었다고 칭찬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음악이 책을 읽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음악에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이미지는 감정을 상상하게 했고 감정은 몸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어른들을 따라만 하는 따라쟁이들에 대한 반감은 더더욱 커졌다. 연기하는 건 기만이었다.

그 남자애가 그런 부류라는 건 아니었다. 반감으로 쳐다보기 시작했으나 애초에 그 애가 내는 한음 한음은 모두 정성스러웠다. 적어도 그러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연습실 사용표에 적힌 그 애의 이름을 훑었다. 같은 교수의 제자인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교수의 집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애의 연습 시간은 한시까지였다. 아무도 연습하지 않은 점심시간이 주 연습 시간인 듯했다. 괜히 그 이름 밑에 이름을 적었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할짝였다. 듣다 보니 쇼팽이란 사람이 괜히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 애는 힐끗, 나를 쳐다보고는 본인 물건을 챙겼다. 평범한 메트로놈, 평범한 수첩, 평범한 업라이트 피아노. 뭐 하나 특별할 게 없었다. 푹 꺼진 의자 높이를 조정했다. 내가 좀 더 큰 모양이었다. 왠지 쇼팽 즉흥 환상곡을 연주하고 싶었다. 내가 외워서 치는 유일한 쇼팽 곡이었다. 방 안의 먼지가 찬찬히 바닥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등 뒤가 따뜻했다. 따뜻한 온도에 집중했다. 영이 떠올랐다. 울던 영의 옆모습. 옆모습을 생각하고 첫 음을 눌렀다. 몇 번 틀렸는지도 모르게 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쩌면 정오의 햇빛 때문일 수도 있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영화처럼 피아노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캠프가 어땠냐는 영의 질문에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 연습하는 게 조금 재밌었어, 하고 말했다. 그랜드 피아노로 연습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그랜드 피아노가 배달되었다. 영은 내가 다녀온 캠프 연습실에서 쓰던 그랜드 피아노를 싸게 빌렸다 했다. 방음공사를 하고 그랜드 피아노를 넣으니 집에서 제일 큰 방이 가장 작은 방이 되었다. 방에 들어가면 고요한 정적으로 삐- 소리가 들렸다. 세상엔 피아노와 나만이 존재했다. 밥 먹을 시간을 알리는 영이 유일하게 정적을 깨는 사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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