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ck of the cities : 도시의 틈> 은 도시를 비균질하게 만드는 거리의 특정 사물, 주로 가구들의 사진을 아카이빙 하는 공간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과한 나의 부모 세대는 초가집에서부터 고층 아파트까지 주거 공간을 옮겨갔다. 그러나 나는 아파트 키즈로 자라왔다. 획일화된 아파트의 경관은 한국의 압축적 성장을 보여준다. 그 성장 아래 나의 유년은 균질한 풍경으로 가득찼다. 나의 주거 지역은 세트장과 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나의 아파트 단지는 한 블럭 너머 다른 회사가 지은 아파트 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차장과 주황색 덮개를 가진 대형 쓰레기통, 놀이터와 경비실, 고동색의 벤치가 비슷한 모양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조경 또한 마찬가지이다. 철쭉과 팬지가 둥근 밥그릇 모양의 대형 화분에 심어져 있었고 같은 종의 회양목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 그 녹색의 작고 딱딱한 잎들을 한 움큼 뜯어내는, 작은 악취미가 있었다.
도시의 틈을 발견한 것은 자취를 시작하고 몸이 아파 집 근처를 조금씩 산책할 무렵이었다. 나는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었고, 그 지역은 낮은 빌라로 가득했다. 높이는 일정했으나 작은 빌라마다 다른 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건물을 소유한 자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다채로운 빌라들을 지나치며 만나게 된 것은 갖가지 의자였다. 서로 다른 디자인의 평상이나 가정용 식탁 의자가 아스팔트 위에 가득했다. 공원에는 시계탑 대신 누군가 기념일에 받은 시계 혹은 가정용 시계가 정자마다 걸려있었다. 의자 옆에는 재떨이가 있었고 그 사물들에는 불법 폐기물 딱지가 붙어있지 않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물들이 수거되지 않고 다양한 이들에게 쓰임새를 갖는다. 도시의 유령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는 의자를 본 경험도 있다. 사용자에 따라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토지의 값이 오르지 않아 균질화, 획일화하는 것을 포기한, 버려진 도시로 보아야 할까? 그러나 나는 아스팔트를 점령한 사물들을 보며 누구의 사유지도 아닌 공유 공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도시의 틈, 토지의 틈이 생긴 것이다. 사적인 사물로 취급되는 가정용 가구가 거리에 나와있는 모습은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이러한 상상은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의 저자 사카구치 교헤의 상상과 맞닿아있다. 그는 자본의 논리, 토지에 관한 현 시스템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교헤는 노숙자들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고 주인 불명의 땅을 찾아 나선다. 자신만의 신정부를 개설하고 이동 가능한 집을 만들며,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한다. 노숙 경력 12년 차의 스즈키상과 만난 그는 스즈키가 경찰이나 행정의 관할에서 벗어난 익명의 땅을 획득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천 부지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이다. 스즈키상에게 아이디어를 얻은 교헤는 이동 가능한 집을 만들어 주차장에 터를 잡는다. 도시의 틈을 이용한 것이다. 그가 발견한 또 다른 아이디어는 ‘DIY 공공물’ 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땅에 정원을 꾸렸고 그것이 맞은편의 맨션까지 번식해나갔다. 맞은 편의 맨션 주인은 공간을 허락하는 대신 관리를 요청했고 정원사는 식물의 이름을 묻는 많은 사람을 위해 화분마다 팻말을 꽂아두었다. 교헤는 이 풍경을 두고 ‘DIY 공립공원’ 이라 칭했다. 사적으로 즐기는 정원이 아닌 공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카구치 교헤가 공저로 참여한 『 99%를 위한 주거 』에서, 시인 심보선은 그를 ‘행복한 인간’이라 칭하며 다소 온건한 픽션과 농담을 건네는 인물로서 평가한다. 그는 교헤의 ‘사적 공공성’이 새롭기는 커녕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미 개탄해마지 않았던 파괴된 공공성의 상태, 즉 사적인 것이 공적인 장을 식민화한 상태’라고 비판하며 ‘어조만 낙관적으로 바꿔서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조은 외 20인 공저, 99%를 위한 주거, 30p, 북노마드, 2013.) 사카구치 교헤는 정치와 만나지 않는 순진한 예술가일지도 모른다. 그는 분쟁을 피하며 누구도 모르게 남아있는 땅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종의 삑사리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가 노숙인들에게서 발견하는 자급자족과 일종의 ‘미니멀 라이프’는 공공성의 확대보다, 개인의 역량으로 주거 공간을 꾸려나가고 현 상태에서 만족감을 찾는 신자유주의적 태도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복한 상상과 농담은 혹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에 균열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그가 제시한 ‘사적 공공성’의 형태는 자신의 사적 재화와 공간을 이웃과 나누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풍경은 역설적으로 공적 공간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한다. 온건한 예술과 정치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마주한 사물과 공간 또한 실제의 공공시설 혹은 공공기관이 아니었지만 공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의자가 발 붙일 수 있는 작은 공간일지라도 공공에 관한, 토지에 관한 상상을 하게 한다. 각종 주거 형태를 겪어 온 나의 부모 세대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의자나 평상이 주로 공공 시설물이 없는 주거 공간 앞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 때문이다. 그것이 혹시 마당의 부재 탓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마당이 있던 시절, 마당은 자연과 소통하며 이웃과 교류하는 공간이자 농사 일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나는 낮은 빌라 앞 의자에 앉아 바둑을 두는 노인들, 그저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 평상 위에 고추를 말리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그 풍경은 현 시대의 작은 마당이 아니었을까?
거리의 사물들은 쓰임새도 다채롭게 변모한다. 사물이 본래의 쓰임새를 달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양이가 캣타워 대신 책장이나 택배 박스를 더 좋아하는 모습을 수차례 목격했다. 이 때 책장과 박스는 새로운 사물로 거듭난다. 사물의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는 일은 흥미롭다. 거리의 의자들은 그저 앉기만 하는 사물이 아니다. 주차 금지 경고판을 대신하기도, 식당의 간판을 대신하기도 한다. 쇠로 된 우편함 대신 종이 봉투나 아이스크림 케이크 상자로 만든 우편함을 본 적도 있다. 업소용 알루미늄 식품 캔이 재떨이로 사용되는 모습은 한국에서 살아 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마주쳤을 광경이다. 이렇듯 거리에서 발견한 모든 사물은 그 쓰임새에 유동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곳에 아카이빙 하는 자료에는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연도와 발견한 지역만 명시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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